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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취향(醉響) _ 소리에 취하다> 공연을 보고

 

이번 공연의 이야기 재료는 향()이다. 그 향이 소리가 되어 울리고(), 그 울림에 의해 떠도는 향에 인간이, 인간의 삶이 취한다(). 태곳적 이 땅에 피어난 한 줄기 바람의 향은 누군가의 몸에 붙어 사랑의 향을 피운다.
꽃향기 풀풀 날리는 기쁨과 희열이 우리 삶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면서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유한한 인간의 삶처럼 향 또한 언젠가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의 운명을 받아들이면 그 이별 또한 향이다. 떠나는 향도 향이고, 아직 머물고 있는 향도 향이다. 그 향에 취해 웃기도 하고, 때론 울기도 하면서, 한 세상 살아내면 그 뿐! 따지고 보면 향이란 결국 인간의 생로병사이고 희로애락인 셈이다.
 
국악단 소리개의 공연을 보고 나면 각각의 퍼포먼스가 단절되어 있지 않고,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즉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라는 말은 공연 전체가 기승전결의 서사적 구조를 가진다는 뜻이다.
사실 무대 공연예술에서는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하다.
 
지난 1010, 국악단 소리개의 공연 <취향 _소리에 취하다>를 보기 위해 올림픽공원 K아트홀로 향했다.

 

 

국악 공연을 보러 갈 때면 내가 공연자가 아닌데도 괜히 긴장되고 설렌다.
몸이 기억하는 익숙한 기대감이 내 안의 호르몬을 들쑤시기 때문이다.
그 호르몬들이 젊은 시절 한때 장구와 쇠, 북이나 징을 치며 놀았던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그때의 사람들을 불러낸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악기 소리와 버무려진다.
그렇듯 즐거운 한때의 기억은 사소한 자극에도 불쑥 되살아나는 법이다.

흔히 사람들은 국악 공연을 보면 흥이 난다고 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그것이 사람의 소리이든, 악기의 소리이든, 우리의 소리는 오랜 세월 우리의 피에 저장된 기억이다. 피에 저장된 기억은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스스로 발화하여 몸에 피를 돌게 한다. 자신도 어찌하지 못한다.
국악 공연장을 일부러라도 찾는 이유이다.
우리 소리에 대한 기억이 응고되지 않도록, 그때 함께 놀았던 사람들의 기억이 응고되지 않도록,
그리고 삶에 쫓겨 잊고 살았던 신명이 응고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국악단 소리개의 공연은 조금 특이하다.
공연 내내 익숙함과 낯설음의 묘한 공조가 이루어진다.
익숙함이야 원래 내 몸에 내재된 것이니 그렇다 쳐도, 이 낯설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귀와 눈이 문득문득 그 낯설음을 감지한다. 익숙한 소리와 가락인 듯 하다가도 그 흐름은 낯설다.
때론 처음 듣는 리듬처럼. 때론 처음 보는 몸짓처럼, 귀를 쫑긋하게 하고 눈을 크게 뜨게 한다. 그러다가 무심한 듯 애절한 듯 가야금 소리를 얹어 놓기도 하고, 작심한 듯 드럼으로 몰아치기도 한다.
짙은 색소폰의 소리가 덧씌워지는가 하면, 법고와 베이스의 긴 울림이 공간을 떠돈다.
듣기 좋은 피아노 선율이 필요한 곳은 증폭시키고 빈 곳은 채워주는가 하면, 극한의 감정을 토해내는 여인의 목소리가 귀를 낚아챈다. 이러한 소리들이 어우러져 아직도 삶에 미숙한 내 감정들을 증폭시킨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것들은 공연 기획자의 의도일 터이다.
국악단 소리개는 사물의 악기만으로 공연을 끌고 가지 않는다. 각 사물이 가진 네 가지 색깔의 익숙한 음색에다가 흔히 재즈의 소리들인 서양 악기들의 소리를 덧칠한다. 그럼으로써 마치 변검처럼 다양한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소리를 매개로 한 크로스오버이다.
사물과 판소리에 재즈를 더한 크로스오버인 셈이다. 우리의 소리와 서양의 소리가 만나 새로운 소리를 만드는 시도이다. 이 순간 무대에 있는 모든 것들, 공연자들의 손짓 하나, 몸짓 하나, 눈빛 하나도 소리로 변하여 버무려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모든 소리가 말을 건다.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고, 마음속에 묻어둔 작부의 눈물을 떠올리게 하고,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 보면 모든 새로운 것들은 익숙함과 낯설음이 공존한다.
그럴 때에만 혁신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새로움은 늘 낯설음을 전제한다.
스티브 잡스의 혁신이 그러했고, 조선후기 문체반정을 몰고 온 연암 박지원의 글이나 추사체로 일가를 이룬 추사 김정희의 글씨도 모두 그러했다. 흔히 이런 과정을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 한다. 옛것에만 안주하지 않고,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 어쩌면 국악단 소리개의 공연에서 느끼는 낯설음도 그 과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978년에 사물놀이가 대중화의 길로 접어든 지 벌써 40년이 되었다.
옛것을 옛것대로 지키는 것도, 그 바탕 위에 새로운 실험을 하는 것도, 지금 시대의 공연자들이 고민해야 할 몫이다. 때론 전통을 현재에 끌고 와 새롭게 시도했을 때, 그것이 미래로 연결된다. 법고창신의 방법론은 국악 공연의 형식이나 내용에도 유효한 것이다. 만약 그런 시도의 낯설음, 그런 시도의 크로스오버라면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응원하고 싶다.

 

 

 

크로스오버의 장점은 한 가지만 따로 떼어놓았을 때의 허함을 서로 채워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경계를 새롭게 확장하는 데 있다.
이것은 잘 섞여서 더 조화로운 양념의 맛과 같다. 양념이란 이런저런 재료를 섞어 그것들이 하나하나 제 역할을 다함으로써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것 아니던가. 각자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맛의 경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물론 무작정 섞는다고 맛난 양념이 되는 건 아니듯이, 그 맛이 제 빛을 발하려면 요리사의 솜씨가 전제되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국악단 소리개의 공연은 새로운 양념을 계속 시도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솜씨 좋은 요리사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또한 양념은 사람의 입맛을 바꾸기도 한다. 양파를 먹지 않는 아이에게 양념에 양파를 갈아 섞은 후 먹이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양파의 맛이 몸에 밴다. 그렇게 되면 생양파를 먹어도 그 맛을 즐길 수 있다. 음식만 그러겠는가. 내게는 판소리나 색소폰 같은 게 양파였다. 잠깐 즐기는 건 가능해도 그것만 따로 떼어놓은 긴 공연 관람은 엄두도 못 내었다. 평소에 자주 안 먹어본 맛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소리개의 공연을 몇 번 보다 보니 판소리와 색소폰에서 내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애절함과 청아함의 소리를 나도 모르게 흡수하고 있었다. 이제는 충분히 그것만의 긴 공연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양념에 갈아 넣은 양파의 맛과 친해진 것이다. 이런 것 또한 크로스오버가 주는 덤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공연예술은 무대에 오르는 순간, 관객에게는 종합예술로 다가온다.
무대에 오르는 장르의 다양성 측면에서가 아니라 관객이 피드백 할 수 있는 여지의 다양성 측면에서 종합예술이라는 의미이다. 관객도 공연의 참여자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능에 최적화된 공연이 국악 공연이다. 그래서 국악 공연의 끝은 언제나 공연자와 관객이 함께 어우러지는 이바디다. 잔치이고 축제이다.

인간의 향()에 한바탕 흠뻑 취하는 것만으로도 이번 공연은 유의미하다.

 

 

* 사족 하나.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공연 막바지에 무대 뒤의 장막이 걷히고, 공연장 뒤편인 올림픽공원 주변의 도로와 건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유리 너머로 라이브하게 보이는 장면이었다. 마치 공연의 일부분처럼. 기획자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순간 불가의 적멸보궁을 떠올렸다. 그 유리 너머엔 불상이나 탑 대신에 사랑과 이별의 향()이 공존하는 우리의 삶이 있었다. 때론 기획자나 공연자의 의도와 별개로 관객이 저마다 받아들이는 여운이 있는 법이다.
 
** 사족 둘. 국악단 소리개라는 이름은 즐거웠던 나의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오래 전, 다니던 회사에서 새로운 모임을 직접 만든 적이 있었다. 풍물패와 답사패의 연합 모임이었다. 그때 내가 제안하여 모임의 이름으로 채택된 것이 소리길이었다. 풍물의 소리와 답사의 을 합친 단순한 조어이지만, 나름 열심히 활동한 덕에 꽤 그럴 듯한 모임으로 성장하였다. ‘소리개란 이름에 더 애착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봉희 / 안티고네 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