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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수상한 궁녀][우리시대는 아직도 수상하다

한윤섭 씨 연출 <수상한 궁녀>를 오늘(7월 13일) 보았다. 몇 년 만에 보는 소극장 공연이라 설렜다. 연극 자체도 본 지 꽤 되었고. 아이 신나라. 눈물 나는 ‘에로’ 코미디라는 카피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호호. 입구 앞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들이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평일 저녁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니 이 날씨에도 마음이 보송해졌다. 티켓 박스에서는 묘한 포스를 풍기는 분이 티켓팅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수상한 궁녀>를 연출한 분 같았다. 호오?


<수상한 궁녀>는 흥부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여 우리시대의 <수상한 궁녀>는 누구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익숙한 모티프를 통하여 나는 거부감 없이 과도한 설정에 수긍할 수 있었다.물론 코믹한 연기를 잘 수행하는 배우들 열연 덕분이다.


이 연극에서 남성은 곧 폭력이다. 왕은 절대권력과 남성이 갖는 폭력을 상징하고, 그 주변부(간신과 내시) 또한 그렇다. 흥부는 다를까? 낮에는 멍청하고 밤만 되면 부인을 채근하고 부인이 풀어주지 않으면 잠도 자지 못하는 ‘무식한 권력’이다. 부인이 ‘보살펴야할’ 열다섯 명의 아이와 다르지 않다. ‘그녀’ 가장 가까이에 폭력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대상화되는, 철저히 세계에서 배제된 이름 없는 자다. ‘그녀’가 남편과 자식,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입궁뿐이었다. ‘그녀’의 유일한 힘은 돼지처럼 새끼를 낳는 전문성이다. 그 전문성은 ‘사내아이(권력)’를 낳는 능력이고, 그 비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상위’이다. 그 ‘비법’은 왕가의 법도에 따라 강력히 거부 되지만 권력의 재생산이라는 대의(大義) 아래서 유일하게 가능하다. 그마저도 왕 자신이 편하다는 장점이 없었다면 불가했다. 사실 그것은 비법이 아니다. ‘그녀’는 등에 종기가 있어 바로 눕지 못한다. 어쩔수 없이 여성‘상위’인 것이다. (궁에 가면 어의에게 치료받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수태 후에도, 출산 후에도 그런 것은 생략된다. ) 그렇게 해서 왕자를 낳고 고작 얻은 이름은 ‘박’을 키우다 입궐했다하여 ‘박빈’이다.


<수상한 궁녀>속 여성들은 모두 권력의 피해자다. 얼핏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로 취급받을 수 있는 역할인 중전도 아이를 낳지 못한, 권력을 재생산해내는 도구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 한 배제된 자다. 중전은 왕자를 빼앗고 나서야 행복해 ‘보인다’. 중간 중간 나오는 궁녀는 남근 없는 내시에게도 희롱 당한다. 내시가 남근을 얻은 후에는 궁녀는 '경험없는 숫처녀'라는 타이틀을 얻게된다.


연극이라는 예술은 권력이 나를 어떤 환경에 몰아넣고, 어떻게 억압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몰입을 통해, 몰입의 방해를 통해 이뤄지기도 한다. <수상한 그녀>는 과장된 액션과 야한 농담으로 비극적 서사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비극으로 떨어지는 인물은 우스꽝스럽게 표현하여 몰이해시키게끔 한다. ‘그녀’ 끝은 자칫 주체적 선택으로 보이지만, 사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은장도는 ‘그녀’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고, 칼끝은 자신의 목이 아니라 자신을 억압하는 남근을 향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 이 시대 <수상한 궁녀>들은 많다.<수상한 궁녀>가 언제쯤이면 이름을 얻고 불릴 수 있을까? 끊임없이 물어야할 질문이다. '그녀' 들이 자신의 이름(삶 또는 죽음)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왕인가, 간신인가, 내시인가, 아님 흥부인가. 과연 나는 무엇을 (비)웃으며 <수상한 궁녀>를 보았는지 생각한다. 권력자를 향하지 않는 웃음은 결국 자기비하 값매겨진다. 약자가 약자를 가지고 만드는 웃음은 반성적일 수 없다. 극이 끝나고 씁쓸한 웃음마저 남아있지 않을 때, 그 이유를 ‘그녀’라는 ‘개인’ 서사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 비극을 웃으며 즐겼다는 나의 죄책감에서 찾아야 한다. 공연장을 나오며 찝찝하지 않다면 잘못이다. 내 주변에 있는 ‘그녀’들을 뻔뻔하게 외면하는 것은, 그저 그들을 그런 식으로 살려두는 건, 내시의 비겁한 변명과 다르지 않다. 나의 기회주의는 참형당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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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티 리뷰단 1기 김보선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