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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또 같이/갑출씨의 어영부영 책읽기

나목

 나목(裸木)

헤밍웨이는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로 불행한 유년시절을 겪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불행하다고 규정할 수 있는 유년시절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 억지로 과거로 돌아가 불행한 유년을 보내고 다시 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들의 현대사는 매우 불행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후손이 판단할 때 지금도 우리는 불행하지만 그늘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또한 당장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1931년 생인 작가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스무살이 되던 해에 전쟁을 겪었고

자고나면 변화하는 정치적인 풍파와 현대사의 숱한 질곡들을 겪었습니다.

박완서선생의 작품 속에는 과거의 기억들에서 끄집어낸 것이 많습니다.

 

이 나목도 바로 그러한 작품중하나며  나이 사십이 다 돼서 소설가로 만들어준 첫 작품입니다.

20대중반에 결혼을 하여 먹고사는 일에 전전긍긍하다가 놓쳤을 법도 하지만 그래도 선생은 작가가 되겠다는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저명한 문인이나 위대한 예술가의 반열에 오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되새기는 작업이었는지 모릅니다.

왠지 모를 사명감도 들어있었겠죠.

다른 글에서 읽은 이야기지만 박완서선생의 사명감은 자신이 겪은 상처를 있게 한 나쁜사람들을 고발하겠다는 마음때문이었답니다.

눈물 마를날이 없었던 개인의 역사가 상상이가는 대목입니다.

 

누구를 고발하는 글을 쓴다고 해서 문학적 완성도 가지는 것은 아니겠죠.

거기에는 분명 작가 본연의 내공과 탁월한 심미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속의 주인공은 한국 미술의 거장인 박수근 화백을 모티브로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박수근 선생이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로 있었고 군인들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유도하고 잡화를 팔던

앳된 아가씨인 본인과의 짧은 인연을 배경삼았습니다.

하지만 박완서 선생은 박수근 화백의 캐릭터와 본인과의 이야기가 실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소설 내러티브가 품은 현대사의 수채화 같은 모습이 더 핵심이겠죠.

 

40대의 그녀가 20대의 기억을 되살려 내놓은

벌거벗은 나무를 뜻하는 나목입니다.

껍데기가 다 벗겨진 초라한 나목, 그리고 다시 무성해질 앞날을 상상하는 기약 없는 마음.

그 희망과 절망의 희비는 한국 문단과 화단의 두 거장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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