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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상

 

연극은 종합예술이고 공동창작품이라 말한다. 그리고 희곡, 배우, 관객을 연극의 3요소라 말하며 무대에서 관객을 상대하는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연극의 요소에 관객이 빠질 수 없는 것은 재공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한번으로 흥행성적이 매겨지지만 연극은 재공연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가는 경우가 많고 완성도를 높이는 요소는 관객의 피드백을 빼놓을 수 없다. 그전에 연극에서 관객을 중요한 구성요소로 놓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현장성 때문이다. 관객이 동시에 호흡하고 반응하는 것도 연극의 일부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연극은 관객을 위한 예술이자 관객 또한 연극상품의 소비자임이 분명하다.
연극을 만드는 사람은 연극의 현장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공연을 하는 기간 동안 작품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별 일 아니라 생각한다. 캐스팅이던 여타의 이유에서건 매 공연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 것도 공연을 몇 번씩 보게 하는 이유라 말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작품을 바꾸고 쥐락펴락하는 권한의 대부분을 연출이 쥐고 있는데 그게 권한이라면 권한이고 책임이라면 책임이다. 어쨌든 다수의 스태프는 연출의 결정을 기다린다. 특히나 작은 극단, 소극장 공연은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동일한 작품을 올리는 중에 과도한 수정이 있다면 현장성이라는 매력을 넘어서 관객의 클레임 소지가 되기도 한다.
 
2005년 국립극단 예술감독이던 이윤택연출은 독일의 프리드리히 실러 작품인 떼도적(군도)을 올리는 과정에서 러닝타임이 길어서 늘어진다는 이유로 공연기간 중에 30분 이상을 날려버렸다. 이윤택연출은 시시때때로 바꾼다는 연출 중에 한사람이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언제고 맘에 안 들면 장면도 캐스팅도 날릴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사람이었다.
 
당시 공연을 국립극장게시판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https://www.ntok.go.kr/Community/BoardReview/Details?articleId=159997

 

이후 이윤택의 바톤을 이어받아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했던 오태석연출 역시 공연 때마다 바꾸고 관객이 극장에 입장하는 순간까지 연습을 시키기로 유명했다.
2008년 오태석 작, 연출의 백년언약의 첫 공연 당시 아직 준비가 안 된 탓인지 1,500석 규모의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관객입장을 공연10분 전에 시작하는 일이 벌어졌다. 극장 안에서는 그때까지 리허설이 진행되었다. 관객들의 불만은 당연히 하우스와 매표, 기획담당자들에게 돌아갔다. 그 작품은 한국연극 100주년을 기념한다는 타이틀이 붙은 작품이었다.

 

 



 
연출의 괴팍한 성격은 그나마 달래며 맞추면 된다는 작은 애교에 불과한듯하다. 그것이 연출의 매력이자 미덕이며 성공요인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랫사람들은 그 성격을 건드려서 대형 참사가 벌어지지 않기를 노심초사할 뿐이다. 이렇게 되면 연출이 작품을 통해 결정해야 되는 몫은 책임과 권한을 넘어 권력이 된다. 나는 이것이 공공기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민간현장에서 스태프들을 만났을 때도 반응은 비슷했다. 어떤 스태프는 연출이 제일 고민을 많이 하고 공연에 대한 책임을 지기 때문에 작업에 들어가면 연출과 대립하기보다 그의 마음을 헤아려서 맞춰줘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본 바로는 연출이 미리 준비하고 여러 가지 변수들을 예측해본다면 공연에 임박해서 그렇게까지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는 것들이었다. 대본이 늦게 나오고 연출이 바빠서 연습을 못 챙기는 등 오히려 스스로의 관리 영역 안에 있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공연압박에 대한 자기스트레스를 남에게 표현하는 것 같았다. 왜 그것을 다른 배우나 스태프들이 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너무 많은 책임과 권한을 연출에게 허용해줬다. 그래서 그것이 대한민국연극계에선 권력이 되어버렸다. 사실 배우들도 연출의 횡포를 싫어하면서 정작 함께 작업할 땐 배우들과의 기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는 연출을 별로 따르지 않는 것 같았다. 쎈 연출이어야만 배우, 스태프들이 협조하는가? 그래서 그런 마쵸적인 괴물이 태어났는가? 항상 연극의 본질에 대해 고민한다고 인터뷰하는 연출들 중에 다른 스태프들과의 협력방안이나 관객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별로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연출이 한번 명성을 얻으면 공공예술기관에서 비싼 연출료 주고 모셔갈 것이며 실력 있는 스태프들이 따를 것이며 홍보마케팅 담당자들은 그의 예술세계를 신화처럼 포장해 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교수도 될 수 있다. 가끔은 아주 허접한 작품을 만들어도 명성에 크게 손상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열악한 소극장연극은 계속 이어지는 지도 모른다.
객석은 부실하고 로비공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소극장공연을 보러 가면 무슨 일 때문에 입장이 지연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바깥에서 기다리는 일이 있다. 날씨가 안 좋기라도 하면 더 짜증이 난다. 이런 상황을 연극하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다. 어떤 스태프로부터 우리나라 관객들은 너무 편하게 공연을 본다.’ ‘외국은 관객의 편의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까지 들었다. 속으로 경악했다. 그 스태프는 연출이 요구하는 것에 최대한 맞춰준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여전히 연출을 비롯한 생산자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숭고한 예술의 정신과 열정으로 포장된 채...
 
홍보한다고 관객들 오는 거 아니니 보도자료 안 뿌려도 되고 프레스리허설은 더더욱 안 해도 되고 번거로우니 예매사이트에 상세페이지까지 안 만들어도 되고 포스터도 온라인용으로만 적당히 만들면 된다.’
 
맞다 예산이 부족하고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있기 때문에 애써 그들과 경쟁하단 작품에 집중하기 힘들다.
 
그냥 만들어서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알리고 페북에 올리면 된다. 나의 열정이 더 중요한 것이지 관객에게 얼마나 잘 보일까를 고민하는 사람은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다.’
 
그래서일까? 연극제작을 할 때 기획과정의 넉넉한 준비보다는 딱 연습해서 발표하는 시간만 가지고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관객을 위한 작품이 되기는 힘들다. 그래도 연극을 한다. 관계자들이 있고 선생님들이 평가해 주기 때문이다.
 
지난 십 수 년간 한국의 영화가 발전하는 동안(물론 영화산업에도 문제점은 많지만) 연극은 관객개발측면에서는 그다지 발전한 것이 없는 듯 보인다. 특히 대학로 소극장은 20년 전의 모습과 환경에도 별반 차이가 없다. 공연계에 몸담고 있는 나조차도 이제는 그 불편한 서비스를 감수하며 공연을 감상할 마음이 점점 사라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예술가의 당당한 자기표현으로 존중해줘야 할지 관객을 아랑곳 하지 않는 마쵸적인 속성이라 비난해야할지는 모르겠다. 이윤택, 오태석이 아니더라도 공연계의 마쵸맨들은 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이글을 쓰면서도 솔직히 그들 다수와 적이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아무리 소극장 연극이라도 제발 좀 시스템 갖춰서 제대로 선보여라라고 면전에 대놓고 말하긴 힘들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여전히 업계 기준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작품이면 되기 때문이다. 관객의 평가를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몇몇의 교수와 평론가들이 잘 봐주면 명성이 생길 것이며 정부기관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을 것이며 어떤 단체의 수장으로 임명될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그리고 한번 명성이 생기면 그 명성은 공인이라는 책임감 이전에 강철검을 부여받는다는 걸 많은 연출가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점점 세월이 흐르면 자신을 따르는 제자나 후배들을 마음껏 다루고 호령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교활한 늙은이가 된다. 시간이 더 지나면 교활한 늙은이는 주위에서 어르고 달래줘야 하는 백발의 어린이가 된다. 그런 미성숙한 어린아이를 우리는 천진난만함이 살아있는 천재예술가로 대접하며 살게 된다. 연극은 관객으로부터 대중적인 지지를 받기 힘드니 바로 그 천진난만한 늙은 천재예술가가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 늙은 천재예술가들이 문화권력의 카르텔을 형성한 채 모든 걸 쥐고 있고 나도 그 카르텔 안에 들어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그들만의 리그는 그렇게 반복된다.
사실 이윤택 오태석의 작품이 위대하다고 평가받을 때에도 한국적인 정서를 어설프게 차용했다는 일반관객들의 비평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력자들의 호평에만 귀를 기울였다.
 
일반인들은 연극을 보는 안목이 없다고만 믿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연극이라는 장르는 일반관객이 모르는 사이에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기 때문일까?
 
이제 공연계를 본다.
클래식계는 안녕하신가요? 국악, 무용계는 어떤가요?
우리의 공연예술을 어디로 어떻게 누구를 위해 발전하고 있는 것인가요?’
 
마쵸적인 예술가들과의 작별을 고하고 그들의 작품도 보이콧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시장을 독점한 자들의 횡포엔 미약한 힘이나마 연대하는 것이 지금까진 최선의 방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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