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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또 같이/갑출씨의 어영부영 책읽기

민중의 적

민중의 적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릭입센(1828. 3. 20- 1906. 5. 23)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사실주의 연극의 효시라고 하는 <인형의 집>을 쓴 작가입니다.

입센은 희곡작가 입니다. 연극대본을 희곡(戱曲) 이라고 하는 건 아시죠?

희극(喜劇)과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민중의 적>을 이야기하기 전에 사실주의 연극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9세기 중엽 프랑스를 중심으로 연극에서 사실주의 운동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합니다.

쉽게 말해서 사실에 가깝게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참고로 사실주의에서 ‘사실’은 한자로 ‘寫實’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fact를 뜻하는 ‘事實’과는 다른 한자죠.

그래서 예술장르의 사실주의는 영어로 Realism 이라고 한답니다.

이건 레알 다 아는 사! 실! 이죠? ^^

 

그 사실주의 운동의 정신을 본격적으로 표방한 작품이 바로 헨릭입센의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주의 연극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사실주의는 고전주의 연극으로 불리는 셰익스피어시대의 작품 및 그 이후에 등장하는 낭만주의 연극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대표 작품들을 떠올리면서 비교해보시면 조금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우선 대사 화법이 운문에서 산문으로 바뀐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극은 시적인 언어를 바탕으로 해서 운율감이 살아있다고 하죠.

사실주의 작품은 그것에 비하면 굉장히 건조하죠.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언어와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품의 주인공들이 왕이나 귀족중심에서 벗어나 우리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로 설정이 됩니다.

가난에 찌든 소시민도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 역시 셰익스피어의 햄릿, 리어왕, 오델로,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교해보시면 좋겠네요.

그리고 또 제4의 벽이란 개념이 등장합니다.

관객과 무대를 구분지는 보이지 않는 벽이죠.

이외에도 대본에 구체적인 지시문이 등장하는 것 같이 사실주의 연극을 규정짓는 특징들은 많습니다.

 

저는 사실주의 연극의 태동배경이 19세기 당시의 사회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제4의 벽이라는 것은 기존의 야외공연 방식에서 조명기술이 발달하며 극장들이 실내에 자리 잡게 되기때문에 생겨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야외의 원형극장이나 셰익스피어 시대때의 반 야외형 극장과는 달리 실내는 프로시니엄이나 블랙박스 씨어터였을 테니까요.

그래서 또한 운문체의 과장된 대사보다 일상적인 언어가 관객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갔으리라 짐작합니다.

관객은 연극을 즐긴다기 보다 관조하는 입장이 되었겠죠.

현대적인 극장구조가 사실주의 사조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또한 18세기 프랑스의 시민혁명이후 유럽사회에서 나타난 시민의식의 성장이 일반인들을 연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생각합니다.

사회에는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인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아이러니와 부조리함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인물상으로는 설명하기 힘듭니다. 좀 더 복잡한 상황 속에서 극을 전개시켜야겠죠.

 

입센의 <민중의 적>은 집단 이기주의에 맞서 싸우는 한 개인의 정의를 그려낸 작품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주인공 스토크먼이 지역발전에 유리한 온천개발이 실상 오염된 온천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빚어집니다.

스토크먼은 진실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돈에 눈이 어두운 지역 이기주의 장벽에 가로막혀 오히려 '민중의 적'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됩니다.

진실을 호소하는 소수의 약자와 다수의 권력, 내부고발자들의 외로운 삶이 지금 대한민국 현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주의 연극은 아직도 연극 사조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연극의 기본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주의 연극의 가치는 단지 무대 위의 비주얼을 사실로 그려낸다는 것뿐만이 아닐겁니다.

진짜 사회에 필요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시대의 양심적 거울과 같은 기능에서 진정 사실주의 연극의 힘이 발휘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음은 극중 대사의 일부입니다.

스토크먼:  유익하고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을 때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가 아닙니까?

시장:  그렇지 않아. 민중이란 원래 새로운 사상 같은 건 요구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아.

       그런 것 보다는 옛날부터 내려온 관례대로 원만하게 다스리는 게 최선의 방법인 게다.

스토크먼:  지금 농담하시는 건 아니시죠?

시장:  진심이다.

우리는 민중의 적이 되더라도 당당하게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