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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또 같이/KooLee의 무대 그리고 사람

관람등급 초고난이도 창극 '적벽가'

창극 적벽가를 보았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역사 소설 삼국지.

그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전쟁 중 하나인 적벽대전을 판소리로 옮겨 놓은 적벽가’.

고수의 장단에 소리꾼이 노래한다는 거 말고는 딱히 판소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전통음악 생초보이지만 제게 적벽가는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인의 추천해준 하나의 영상 덕입니다.

 

 

 

 

 

이 영상은 저에게 신선한 전율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판소리를 듣고도 소름이 돋을 수 있구나

 

기존에 알고 있던 한이 서려있는 판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소설 원작의 스케일과 스펙터클만큼이나 박진감 넘치고 선 굵은 적벽가는 이 후 저의 마음속에 거친 남자의 로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도로변에서 창극 적벽가의 홍보 배너를 보았습니다.

다시금 영상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낀 전율이 올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비록 얼마 전 변강쇠 점찍고 옹녀가 처음 접한 창극일 정도로 창극 초보 관람자이지만 적벽가는 꼭 봐야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표를 구하고 공연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기대를 하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공연 후 느낄 만족감을 확신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공연날 공연장으로 향했습니다.

심장이 뛰는 이유가

국립극장의 가파른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서인지 공연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슬아슬하게 공연장에 도착하여 객석에 앉아 어둠 속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공연 시작을 기다렸습니다.

 

 

 

 

공연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 후 고요한 암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암전은 1020123... (체감상)5분간 이어지고 알 수 없는 음향 효과가 흘러나왔습니다.

너무 오래된 고요함에 혹시 무대 뒤에서 사고가 난거 아닌가하는 걱정이 될 때 쯤 다행히 영상과 극이 함께 시작했습니다.

 

잡념을 접어 두고 공연에 집중하였습니다.

도원결의’, ‘삼고초려적벽대전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걸음걸이와 연기로 지루하게 보여줄 때까지만 해도 저의 전통예술에 대한 부족한 소양을 자책하며 관람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만족감으로 변할 거라 믿었던 기대감은 배신감으로 변해갔습니다.

역풍으로 승리를 이끈 제갈 공명의 활약은 영상으로 아주 간단하게 표현 혹은 처리되었고

1부 마무리였던 자룡 활 쏘다장면은 역동성과 임팩트이 사라진 채 느슨한 구성으로 은근슬쩍 넘어갔습니다.

이 것들 말고도 크고 작게 행해진 수많은 만행을 목격하고 받은 충격은 절 인터미션 20분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인터미션을 마치고 다시 시작된 2부.

2부 역시 저의 내면 깊은 곳에 있던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마저 몰살하였고

결국 전 패잔병이 되어 극장문을 빠져나왔습니다.

 

 

 

자연스럽지 못한 무대 진행, 징검다리 건너듯 널뛰는 극 구성, 개인적인 기량(과 업적)의 문제를 떠나서 극에 녹아들지 않는 도창 외 출연자 등 창극 적벽가의 무대 위에는 많은 문제가 널려있었습니다.

 

이런 수많은 문제들은 결국 하나의 공통분모에서 만난다고 생각됐습니다.

바로 연출

 

배우들의 연기에는 목적성이 불분명하였고

소리와 극은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야기 전개에는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어느하나 빠지지 않는 출연진과 창작스태프마저 초라하게 만드는 조합의 연속이었고

이러한 모든 것들은 연출의 탓이라 생각합니다.

 

오페라 연출을 주로 했다는 이소영 연출은 음악이 가진 힘도 이야기가 가지는 매력도 살리지 못하고 무대 위 출연자와 객석의 관객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홍보 리플릿에는 그를 감각적인 미장센, 섬세하고 치밀한 연출력으로 정평이 났다고 쓰여있었지만

제가 보기엔 감정적이고 답답하고 무의미한 부분에 디테일에 집착하는 연출로만 느껴졌습니다.

 

 

 

얼마 전 처음 본 창극인 변강쇠 점찍고 옹녀는 저에게 창극이 서양의 뮤지컬이나 오페라처럼 우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우리만의 무대 화법이라고 느껴지는 반가움이었습니다.

창극이 충분히 편하게 볼 수 있는 장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본 이소영 연출의 적벽가는 저 같은 (우리 전통 예술에 익숙하지 않은) 보통사람이 절대로 봐서는 안 될 공연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어렵게 시도한 전통 예술과의 만남에 트라우마가 생겨 다시는 전통 예술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지 모르니까요.

 

전 아직까지 고작 두편의 창극 밖에 보지 않았습니다.

'적벽가'의 쓰린 기억으로 우리 전통 예술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지 않도록 정신수양을 해야할 듯 합니다.

세 번째 만남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