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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또 같이/갑출씨의 어영부영 책읽기

전태일평전

 

 

전태일평전

 

 

 

 

얼마 전 3살 꼬마 시리아 난민 에이란 쿠르디의 사진 한 장이 전 세계를 눈물짓게 했습니다.

조국을 떠나 거친 바다에 몸을 맡겼지만 터키의 휴양지에서 게으른 듯 늦잠을 자는 모습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유럽의 여러나라들이 난민정책에 대해

얼마나 인색하게 굴었는가 하는 반성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에이란의 죽음과 침묵의 웅변은 에이란이 가진 사회적 지위를 뛰어넘어 여느 정치 지도자의 목소리보다 유럽사회의 큰 울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이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닌 순교에 가까운 것입니다.

꼭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어도 억압과 박해의 빗장을 푸는 울림을 가져다주었으니까요.

 

 

우리나라 노동계에도 이와 비슷한 순교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1970년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외치며 분신했던 전태일 열사입니다.

그는 사망당시 22살, 우리나이로 따져도 고작 23살의 꽃다운 청춘이었습니다.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회 최 하위계층 청계천 봉제노동자의 죽음은 당시 수많은 지식인들을 광장으로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전태일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분신당시 바로 숨을 거둔 것이 아니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당시 의료보험도 받을 수 없었고 열을 내리게 하는 만오천원짜리 주사를 맞을 돈이 없어 8시간동안 방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배가고프다’였습니다.

어머니인 이소선여사는 눈앞에서 아무런 힘도 못쓰고 자식을 먼저 보냈으니 그 슬픔을 천형처럼 가슴에 품고 살아야했을 것입니다.

 

 

 

전태일열사의 생전에 바람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로기준법이 있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노동법에 대해서 공부해 보려해도 어려운 한자투성이의 글을 이해할도리가 없었기에 책의 어려운 내용을 물을 수 있는 대학생친구를 가져보는 것이 첫번째 소원이었고 환기도 되지 않는 작업장에서 16시간 노동을 감수해야했던 청계천 노동자들의 근로환경을 개선해보려는 것이 두번째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은 근로기준법에서 보호받는 당당한 권리였습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엔 너무도 소박한 꿈이었죠.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도 우리나라 인권 운동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변호는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입니다.

경찰조사를 받던 중 성고문을 당한 권인숙씨의 변론을 맡아 힘든 재판과정에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 가해자인 문귀동경장에게 법의 심판을 받게 한 것입니다.

조변호사는 생전에 전태일열사와 생전에 일면식이 없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심정으로 전태일열사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합니다.

하지만 자신도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6년 동안 수배생활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책을 출판했을 땐 자신의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고 1차 개정판이 나올 무렵에야 저자의 이름을 밝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개정판출간 보지 못하고 폐암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뜨고맙니다.

 

https://youtu.be/5YTPL_O-BiI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억압에 맞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더욱더 어려워집니다.

꼭 누군가의 순교로 사회가 바뀐다면 당사자와 그의 가족들에게는 너무 잔인한 열매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순교자들의 죽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남기고간 지금의 소박한 행복이

누군가에겐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과 피의 댓가로 이루어졌다라는 사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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